우리는 종종 “좋은 사람들에게 감사하라”는 조언을 듣습니다.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고, 정기적으로 안부를 묻고, 우리의 야망을 지지하며, 진심으로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 말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언은 때때로 너무 기계적이거나 감상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의심합니다. “정말 좋은 사람이라면 굳이 이런 알림이 없어도 그 가치가 증명되지 않을까?”라고 말이죠.
그러나 이러한 의심은 인간 본성에 관한 핵심적인 사실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극적이게도 우리 앞을 지나가는 선함(goodness)과 다정함(niceness)을 범주적으로 부정하고, 무시하며, 짓밟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마치 ‘버릇없는 아이(spoilt children)’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영광들을 제대로 살피지 못합니다. 우리는 평온함과 달콤함보다는 오히려 드라마와 고통에 더 깊이 매료되곤 합니다.
이러한 우리의 태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대하는 방식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봄의 생기, 나무 사이로 비치는 빛, 황혼의 하늘, 식탁 위의 레몬, 숲길, 그리고 해안가의 바다 색깔과 같은 일상의 아름다움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우리가 세잔(Cézanne), 르누아르(Renoir), 고흐(Van Gogh), 베르메르(Vermeer)와 같은 화가들의 작품에 그토록 감동하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평소에 그들이 포착하려 했던 세상의 숭고함(sublimity)을 외면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예술은 일종의 ‘자기 비판(self-criticism)’이자 ‘속죄(atonement)’입니다. 그들의 캔버스는 우리에게 말합니다. “출근길에 하늘을 좀 올려다보라”, “봄에게 불친절하게 굴지 마라”, “꽃병에 담긴 희망과 기쁨을 알아차려라.” 우리가 그들의 그림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우리가 제정신이고 사려 깊은 사람이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할 것들로부터 얼마나 멀리 표류해 왔는지에 대한 반성에서 기인합니다.
꽃이나 계절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변의 좋은 사람들에게도 ‘무감각(inured)’해집니다. 우리는 친절을 ‘당연한 것(taken for granted)’으로 치부하고, 평온함을 ‘지루함(tedium)’으로 착각합니다. 우리는 인내심을 보여준 사람에게 감사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를 괴롭히고 복잡한 감정을 유발하는 사람들에게 ‘자석처럼 이끌리는(magnetically drawn)’ 오류를 범합니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성장 과정에서 겪었던 복잡한 인간관계의 패턴을 반복하려는 심리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는 이러한 패턴을 깨야 할 때입니다. 파리의 전시회장을 나오며 느꼈던 감동이나, 봄날 양귀비 들판에서 다짐했던 순간들처럼, 우리는 우리 곁에 있는 ‘진실하고 친절한(good, kind and true)’ 사람들에게 진심 어린 ‘경의(homage)’를 표해야 합니다.
인생은 우리가 다정함을 온 마음을 다해 공경하기에도 너무나 벅차고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너무 늦기 전에(before it's too late)” 우리 삶에 스며든 선함과 아름다움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삶의 비극을 견뎌내는 가장 성숙한 방식일 것입니다.